아테네 원형극장에 모인 2만명… 비극 보며 '숙고하는 인간'이 되다

입력 2018-05-18 17:45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1) 관조(觀照)




나는 누구인가?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나는 내 삶의 터전인 대한민국에서 꿈과 희망을 키운다. 2018년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선진국 도약은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기반을 통해 가시화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발전은 국민 개개인의 ‘자기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리더의 비전도 깨어 있는 국민과 시민의 간절하고도 헌신적인 호응 없이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나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그 지혜를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일어난 ‘정신적인 혁명’을 통해 얻고 싶다.

대부분 국가들에서 왕정이 유일한 정치제도로 당연하게 수용됐을 때, 고대 그리스의 몇몇 정치가들과 시인들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실험했다. 그들은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았다. 그들은 ‘공공교육’을 통해 자신이 지닌 자만과 욕심과 같이 아테네 공동체를 저해하는 해악들을 시민들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공동체 교육을 시작했다. 그 교육이 바로 ‘그리스 비극 공연’이다.

‘정치적 동물’

인류는 기원전 5000년께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에 살면서 자신의 생존력을 높였다. 그 안에 ‘개인의 삶’은 없었다. 개인은 날 때부터 자신의 신분이 정해져 있으며, 그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분이 요구하는 노동을 수행할 뿐이었다. 고대 사회는 왕을 중심으로 그의 일가친척들로 구성된 극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대다수 시민들은 이들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들로, 자신들의 소출 대부분을 세금으로 귀족에게 바쳤다. 만일 할당된 수확량이나 세금을 상납하지 못하면 이들은 바로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

기원전 8세기 고대 그리스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와는 다른 사회구조를 지녔다. 고대 그리스 도시는 이주민들에 의해 서서히 형성된 도시들이다. 특히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레반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많았다. 그리스는 전통적인 가족, 친족, 부족을 초월해 같은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 그들은 유사시 외부의 적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평상시에는 서로 간 평화를 유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기본 단위를 ‘폴리스(polis)’ 즉 ‘도시’라고 불렀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 도시 연합군은 당시 오리엔트와 지중해를 장악한 페르시아 제국과 전투를 벌인다. 그들은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과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전쟁을 통해 새로운 정치제도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간을 그리스어로 ‘쪼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이라 표현했다. 쪼온 폴리티콘을 직역하자면 ‘폴리스 안에 사는 동물’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공생하는 동물로, 개인에게 가장 적합한 삶을 최대한 보장하는 규율과 관습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산다.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과 개성을 그 공동체 안에서 발견해 발전시켰다.

‘경쟁’

고대 그리스는 수백 개 도시의 집합이다. 서양의 농구나 축구 경기를 보면 국가 대항이라기보다는 도시 대항이다. 도시보다 큰 정치 구조를 만드는 것은 금기시됐다. 이 도시들은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탁월성을 성취하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다. 아테네인들은 ‘경쟁’을 그들의 삶을 고양시키는 원동력으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어로 경쟁은 ‘아곤(agon)’이다. 아곤은 전차와 승마 경주일 수도 있고, 전통적이며 공적인 의례에서 거행하는 음악이나 문학을 통한 각축일 수도 있다. 아곤은 종교 축제, 특히 매년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무대에 올리는 비극 경연대회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된 포도 재배와 관련된 시민 축제다. 시민들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위계 질서를 허무는 행위를 허용했다. 특히 여성들과 외국인들이 가면을 쓰고 참여했으며 자신들이 아테네 도시의 온전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경쟁은 문학과 예술에서 두드러져 예술가들과 시인들을 자극했다. 그리고 개인들은 자신들의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연마하고 경쟁했다. 미케네 문명이 사라지고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왕들은 사라지고 도시를 치리(治理)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기원전 700년께, 아테네 자유 시민들이 주축이 된 자발적인 군인과 군대가 등장한다. 이 완전 군장한 보병들을 ‘호플라이트(hoplites)’라고 부르고 호플라이트가 함께 모인 집단 형태를 ‘팔랑스(phalanx)’ 즉 ‘밀집대형’이라 부른다. 다른 문명들의 왕이나 군주는 자신의 부와 권력으로 사병을 조직해 권력을 장악한다. 이들은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책임을 진다. 그러나 아테네는 일상적인 농부가 스스로 창과 방패를 사고 밀집대형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해 그 책무를 다한다.

아테네 군인들은 보수를 받지 않는 시민 병사들로, 전쟁 후에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공공의 안정과 이해를 위해 독립적으로 자원한 군인들이다. 그들은 전쟁 중에 밀집대형에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담당한 것처럼, 평화로운 시절에는 아테네 정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아테네는 민중이 대거 정치에 참여했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과 공동체 이익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이런 도시국가에는 복잡한 관료제도가 필요 없었다. 커다란 조직을 관리하고 감찰할 인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료조직을 지탱할 자원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정기적인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사제가 필요 없었고 당연히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이런 다양하고 역동적이며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처음으로 사변적인 철학이 등장했다. 이 세계관은 과학과 철학의 핵심인 관찰과 이성을 기반으로 생겨났다.

‘관조(觀照)하는 인간’

고대 그리스의 최초 비극은 기원전 472년 아테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초연된 《페르시아인》이다. 그해 수많은 비극 작품들 중 1등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젊은 그리스 귀족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이 시민 축제가 되도록 비극 공연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지원하는 ‘코레고스(choregos)’ 즉 ‘후원자’였다. 《페르시아인》이라는 비극 작품을 쓴 작가는 아이스킬로스다. 아이스킬로스와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의 성격을 이 작품을 통해 규정한다.

아테네 원형 극장에 2만 명이나 되는 아테네 시민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모였다. 이들 대부분은 마라톤전쟁과 살라미스전쟁에서 살아남은 참전 용사들이다. 이들은 아테네 같은 작은 도시가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쳤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그리스 군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비극의 장소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사’이며, 등장 인물은 페르시아 제국의 왕 크세르크세스, 그의 어머니 아토사, 그리고 그의 죽은 아버지인 다리우스 대왕, 페르시아 원로원의 원로들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이 자만에 빠져 살라미스전쟁에서 패했다고 흐느껴 운다. 아테네 시민들은 원형 극장에 앉아 마라톤과 살라미스전쟁에서 자신의 형제와 부모를 살해한 적인 크세르크세스가 목 놓아 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들은 어느 순간 스스로 비극의 주인공이 돼, 주인공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무아(無我)상태로 들어가 자신들의 원수인 크세르크세스 입장에서 세상을 관조(觀照)하기 시작했다. 관조란 내 입장에서 무심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입장에서 대상의 염원을 읽어 내는 능력이다. 그들은 비극을 통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거룩한 끈인 ‘연민(憐憫)’을 수련했다.

민주주의는 그리스 비극 공연이 낳은 자식이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숙고하는 인간’이 됐고, 인류에게 ‘민주주의’를 선물했다. 나는 최고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 작품들을 통해 선진 국민이 되기 위한 공공교육을 실험하고 싶다. 다음주부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시작으로 ‘숙고’와 ‘연민’을 수련하는 거룩한 여정을 한국경제신문 독자들과 함께 떠나고 싶다.

●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1962년 출생. 고대 오리엔트 문자와 문명을 전공한 고전문헌학자. 미국 하버드대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를 전공해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에 개원한 미래혁신학교 ‘건명원’의 운영위원이다. 저서로 《수련》 《심연》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여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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